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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2 - "왜 광주였나?"


(앵커)

'5.18은 왜 하필 광주에서 일어났나?' 이런 의문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신군부 명령에 따라 계엄군이 유독 광주에서 살인 진압을 펼쳤고 시민들은 이런 불의에 맞서 적극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33년 전 오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33년 전 오늘은 일요일이었습니다. (1980.5.18. 일요일. 구름많음. 낮최고기온 25.1도)

시민들이 휴일의 여유를 즐길 무렵인 오전 10시, 전남대는 분위기가 심각했습니다.

학교를 장악한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진 겁니다.

5.18의 신호탄이 되는 사건입니다.

계엄군은 닥치는대로 곤봉을 휘둘렀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 붙잡았습니다.

(인터뷰)이성길/5.18 구속부상자회 전 회장
"(계엄군이) 2인 1조가 돼서 끝까지 추적을 한다니까... 그리고 잡아요. 또 잡는 과정이 잔인하잖아요. 곤봉으로 두드려 패고 발로 밟고 그 다음에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이전과 달라도 너무 다른 공격적 진압에 놀란 학생과 시민들은 비상시에 도청으로 모이자는 약속대로 금남로로 몰려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길을 막아선 건 경찰이 아닌 특전사 군인들이었습니다.

진압방식은 잔인했습니다.

(인터뷰)조양배/5.18 구속부상자회 이사
"(계엄군이 휘두른 곤봉에) 내 머리 뒤통수가 펑 하는 거예요. 멍해가지고 있는데 내 몸이 공중에 뜨는 거예요. 언제 차가 왔는지 트럭에 양쪽에서 계엄군들이 잡아서 끌어올려 가지고 바닥에 쓰러지니까 '이 새끼 엎드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전국에 공수부대를 보냈지만 유독 광주에만 병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시위대 규모가 수백명에 불과했는데 7공수에 이어 11공수, 또 3공수 병력을 자꾸 자꾸 내려보냈습니다.

나중엔 5천명의 사단 병력 전체를 보냈고 항쟁 마지막에는 2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인구 73만의 도시에 깔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초강경 진압에도 광주시민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정관/전남대 정외과 교수
"전두환 세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강하게 투쟁을 한 것이거든요. 해방 광주를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 5월 27일의 학살까지도 도망가지 않고 싸워내는 불굴의 싸움이었어요."

계엄군의 만행에 시내는 쑥대밭이 됐고 이날 하루만 4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계엄군에 체포됐지만 시위대 수는 점차 늘어나 이날밤 9시에는 2천명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계엄군에 맞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지역은 전국에서 광주가 유일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5.18이 왜 광주에서 일어났나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김철원
광주MBC 취재기자
시사보도본부 뉴스팀장

"힘있는 자에게 엄정하게 힘없는 이에게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