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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광주 3.1운동 이끈 '비밀결사'

(앵커)
100년 전 광주의 3.1운동은
청년 학생들이 주도했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했습니다.

보도에 남궁 욱 기자입니다.

(기자)

이 까까머리 학생들은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
광주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독서토론회인
'신문잡지종람소'회원들입니다.

겉으로는 독서모임이었지만
사실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였습니다.

이들은 1919년 광주에서 있었던
3.1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이맘때
일본에서 있었던 2.8독립운동 선언서를
몰래 가져다 광주 조선인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인터뷰)김행자/(독립운동가 김범수 친손녀/전남 여중*고 역사관장)
"(할아버지가)인쇄기 하나를 사가지고 가마니에 숨겨서
광주에 내려오셨어요. 가마니로 6가마니를
태극기하고 격문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
해서(배포했습니다)."

이어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돼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광주에서는 열흘 뒤 거사가 일어났습니다.

(스탠드업)
3월 10일 3시 반.
이 곳 광주교 아래 모인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c.g.)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에 따르면
광주에서의 첫 시위는
지금껏 알려진 옛 서남대병원 자리가 아닌
지금의 광주공원 앞 다리입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 행렬은
광주우체국을 지나 충장로4가로 이어졌고
농업학교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시위군중은 수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때 시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광주의 조선인은 103명.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대부분이
10대와 20대였고 그 중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학생들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인터뷰)노성태/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
"(3.1운동에)천 여명이 참여합니다. 당시
광주 인구가 2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대단한 비율이죠. 지금 150만으로 비유하면
10만 명이 참여했던(운동입니다)"

지금은 쇼핑 상가와 음식점이
들어선 광주천과 금남로 일대.

백년 전 3.1 운동과
10년 뒤 있었던 학생독립운동,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의로운 항쟁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MBC뉴스 남궁 욱입니다.

남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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